「선생님, 저는 알코올 의존이라는 병을 하늘이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저는 오만덩어리로 살뻔 했는데…. 지금은 세상을 겸손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잖아요』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한보따리의 짐을 잔뜩 지고 간다」

동사무소 담당자가 그에 대한 상담을 부탁한다며 전화를 미리 한지라 오후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깔끔했지만 가까이서보니 얼굴이 불그스름한 것이 술을 한 잔 마시고 온 모양이었다. 그는 술에 대해 어려운 부분을 한참 동안 이야기해 나갔다. 이에 지금 상황 및 치료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었으며, 센터의 프로그램 참여를 권유하는 내 얘기에 그가 어렵게 한마디를 꺼냈다.

『제가 목욕탕 때밀이거든요. 어린 자식 셋이 있고 지금 많이 어렵습니다. 누가 동사무소에 가면 나같은 사람을 도와준다고 하기에 왔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센터에 나왔다고 그냥 도장만 찍어주고 동사무소에 제출하면 안될까요?』

그순간 치료받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듯한 모습에 안타까움과 함께 한숨만 나왔다. 하지만 그의 악의없는 표정과 현실 속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내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구요. 선생님이 단주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시다면 어쩔 수 없네요. 하지만 현재 선생님 상태로서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셔야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네』힘없이 뒤돌아가는 모습에 그가 다시 찾아오리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센터에 하루 이틀 나오면서 결석이나 지각을 하지 않고, 센터의 구석구석 청소며 어려운 일을 도맡아서 하는 성실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처음에는 프로그램 시간에 거의 말도 하지 않던 소극적인 모습에서 점점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진실되게 표현하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단주생활의 원동력은 성실함과 겸허함

그는 3살 때 어머니가 가출하였으며, 그당시 마부였던 아버지는 새로운 장애인 어머니를 맞이하게 되었다. 의사소통이 어려웠던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잦은 말다툼 끝에 헤어지게 되었고, 9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세상을 비관하며 자살을 하였다. 그 이후 그는 농사일을 하던 작은아버지 밑에서 일을 하다가 서울로 와서 목욕탕일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돈을 벌어서 동생들을 교육했으며, 큰 돈을 벌기 위해 배를 탔다. 전재산을 털어서 동생을 결혼시키면서 자신은 다시 힘든 목욕탕 때밀이를 시작했고 아는 친구의 소개로 종교집단에 들어가 그곳에서 소개받은 일본인 여자와 현재의 부부의 인연을 맺고 있다.

그 이후 많은 돈을 벌었지만 집안살림은 늘지 않았으며, 부인의 종교생활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자신은 종교집단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목욕탕 업주에게 사기를 당해 자신의 전 재산을 잃게 되었다.

그 이후 매일매일 술로 세월을 보냈고 하던 일도 중단해 버렸다. 「이러면 안되지」하는 생각에 일을 나가보지만 사기 당했던 돈 생각이 나서 견딜수가 없었으며 그러다보니 술을 매일 마시게 되고 생활은 점점 힘들어져 이곳까지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성실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도움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항상 고마운 마음을 보여 주곤 했다. 센터 주간보호프로그램을 다니면서 한번의 재발상황을 맞이 했다. 일본인인 부인은 완전히 종교집단에 자신을 맡긴 채 생활을 돌보지 않았고 이에 단주하고 새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그에게는 술이 깬후 세상이 자신이 짊어져야 할 현실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것 또한 술을 먹기 위한 핑계임을 알고 곧 일어났으며 다시 단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순간순간 외로움과 고독감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지만 점점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에 대해서 겸허히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주간보호프로그램을 수료하고 직장인 회복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단주생활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성실함과 세상의 어려움을 짐이 아닌 삶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함이 아닌가 한다. 하루종일 목욕탕에서 여러사람의 때를 밀다가 자신의 때를 벗기기 위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그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인다.

김선희 | 서울까리따스알코올상담센터 정신보건사회복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