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영 | 인천알코올상담센터장

지난 해 7월 단정한 옷차림의 60대로 보이는 노부인이 센터를 방문했다. 결혼생활 40년에 이르는 할아버지의 음주 때문이었다. 결혼 사흘째 되는 날 술에 떡이 된 채 친구의 지게에 실려 온 이래로 지속된 남편의 음주문제를 더 이상 두고 참고 지낼 수만은 없어 보건소 이동상담을 통해 센터를 알고 상담을 받으러 오셨다.

남편은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는 온순하고 착한 사람인데, 한 번 입에 술을 대기 시작하면 10일이고 20일이고 식사를 거른 채 술을 마신다는 것이었다. 술을 마신 상태에서 행해지는 온갖 트집 잡기는 욕으로 이어지고 급기야는 기물 부수기와 손찌검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에는 매일 식사도 거른채 술만 마셔서 꼬챙이처럼 말라가는 모습을 보니 저러다가 무슨 큰 일 치루는 것 아닌가 싶어 겁도 많이 난다고 걱정을 했다.

한바탕의 넋두리 끝에 어느 정도 감정을 수습한 할머니에게 남편은 알코올 중독이라는 병에 걸렸다고 말씀드리고, 일단 음주를 멈추기 위한 병원 입원 치료의 필요성을 권했다. 그리고 퇴원 후에도 술을 끊기 위한 생활 습관, 사고방식, 인간관계 방식 등 전반의 변화를 위해서 할머니 역시 도움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과 이를 위해서 가족모임에 나오실 것을 권했다.

처음에 할머니는 많은 알코올 중독 배우자가 그러한 것처럼 남편이 병원에 갈 리가 만무하며, 강제로 입원을 시켰다가는 정말 자신을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가족모임에서 다른 선배(나이는 어리지만) 가족들의 경험과 격려를 받고나서 아들이 돕기를 거절하였지만 용기를 내어서 남편을 입원시켰다. 남편을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키고 나서 할머니는 너무나 속상해 하시면서 많이 우셨다.

부부 관계의 변화를 위해서는 우선 힘이 있는 할머니가 먼저 변해야 했다. 이전처럼 술을 안 먹고 어깨가 늘어진 남편이 안타까워서 술값을 대주는 혼란된 사랑도 바꿔야 했고, 남편에게 있는 그대로 알리지 못한 남편의 음주로 인해서 할머니가 느꼈던 고통과 절망을 명확하게 전달할 것을 권했다. 장장 7장의 편지를 받고 변화가 시작되었다. 면회만 가면 욕을 하던 남편이 부인의 편지를 받고 자신의 잘못을 미약하게나마 받아들이게 되었고, 꼬박꼬박 면회에 간식을 챙기는 할머니를 보면서 자기를 버리지는 않겠구나하는 믿음이 생겼다고 한다.

3개월 후 할아버지는 우리 센터 새삶치료공동체 주간재활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퇴원 할 수 있었다.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우리 센터 프로그램에 처음 참여하던 할아버지의 그 긴장된 모습과 자존심 상해하면서 급기야 『술이야기만 하면 되지 뭐 어린 사람들이 윤리를 가르치려고 하냐』며 벌컥 화를 내며 뛰쳐나가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 1주일은 할머니가 꼬박꼬박 모시고 온 듯하다. 그러나 그 이후 할아버지는 한 번도 프로그램에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참여하셨다.

「정직하자, 인내하자, 깨어 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다.」라는 생활철학들의 구절구절이 왜 단주생활 유지에 필요한지를 잘 연결지어서 생각하실 뿐만 아니라 정말 일상생활에 적용하시려고 초등학생처럼 노력하셨다. 우리 센터의 치료공동체 철학 가운데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하자」라는 구절이 있다. 청소를 오랜 동안 하지 않은 사람은 왜 청소를 하는 것이 좋은지 모른다. 그런 경우에는 일단 청소를 해봐야 청소하고 난 후 깨끗해진 주변을 보고서 청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오랜 세월 동안 술과 사시면서 타인에 대한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차고 어려움은 조금도 참기 어려웠던 체질화된 행동과 마음의 습관을 바꾸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정말 그런 것처럼 행동하셔서 우리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다. 8개월 동안의 프로그램을 수료하던 날 『이제는 정말 죽기 전에 아버지다운 아버지로 남편다운 남편으로 한 번이라도 살고 싶다』는 말씀에 우리는 감동과 보람을 넘어선 인간에 대한 희망감에 모두들 눈시울을 붉혔다.

할아버지는 지금 아파트 경비 일을 나가신다. 초등학교만을 나오신 할아버지는 우리 프로그램에서 매일매일 쓰는 단주일기를 너무나도 힘들어하셨다. 그런데 경비생활을 하면서 이러저러한 서류를 작성하는데 그 단주일기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신다. 할아버지의 변화와 성장을 증언하는 단주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성장과 회복에는 나이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험난한 일을 왜 하느냐고 물으면 난 주저 없이 『알코올의존자들을 통해 내가 성장하기 때문에 난 이일을 사랑하고 좋아한다.』라고 말하며 이 글을 마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