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정호 | 가톨릭대 성모병원 정신과 교수·한국직장인지원전문가(EAP)협회 회장

퇴직하거나 은퇴한 남자를 「젖은 낙엽」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원래 일본에서 시작된 말로 지저분하고 쓸데는 없으며 방바닥에 붙어서 잘 일어나지도 않고 부인이 외출하려고 하면 떨어지지 않으려 졸졸 따라다니는 남편을 이르는 말이다. 젖은 낙엽이라는 의미는 떨어지지 않았다면 싱싱한 생명이지만 이미 떨어진 신세이고 그렇다고 젖지 않았다면 태우는 연료라도 쓸 수 있겠지만 아무데에도 쓸데는 없으면서, 쓸어버리려고 해도 빗자루에 딱 붙어서 귀찮게만 하고 처치 곤란한 존재라는 뜻이다.

직장에서 은퇴한 뒤 가정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남편들

사실 우리나라 남자들만큼 열심히 일하는 인종은 드물 것이다. 하루 종일 상사 눈치보고 시달리다가 야근에, 회식에 열두 시를 넘기는 것이 다반사다. 만날 늦다보니 자녀 얼굴을 제대로 대할 시간도, 밥상머리에서 식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할 짬도 나지 않는다. 부인은 싫은 내색이기는 하지만 잔소리 좀 하다가 「이제는 포기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낸다. 그러다가는 덜컥 「황혼이혼」이라는 카드를 꺼내놓는 아내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아이들 클 때까지만 참으면서, 마음으로는 벼르다가 어느 날 『도장을 찍어라.』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워낙 잘 준비하고 결심한 것이기에 남자입장에서는 황당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이렇게 이혼 당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젖은 낙엽」 취급을 받는 남자들은 부지기수다. 사실 젊었을 때 일이 힘들다, 스트레스가 많다 하지만 그만큼 일에는 중독되기 쉬운 요소가 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한 명분으로 일을 하지만 자신에게도 그만큼 보상이 있다. 돈과 명예, 주변에 따르는 사람도 있다. 마치 스스로가 아주 중요한 사람인 것 같은 느낌도 들게 해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일을 하고 있는 동안이지, 그것이 금단되어버리면, 즉 일을 그만두고 나면 돈도 명예도 사람도 따르지 않는다. 오직 일 가지고만 대인관계를 맺어왔던, 사람은 오히려 은퇴하고 나면 만날 사람이 없어진다. 물론 은퇴 후 1~2년은 나름대로 바쁘게 지낼 수 있다. 못해본 운동과 취미 생활도 하고 관광이나 산에도 다녀보기도 한다. 간혹 일하느라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그 뿐, 돈도 슬슬 달리기 시작하고 사람들하고도 멀어진다.

결국은 갈 곳이 없다. 오직 아내 밖에는 기댈 곳이 없다. 아내마저 등을 돌리고 나면 밥 한 끼도 챙겨먹기가 어려우니 불쌍하기 짝이 없다. 그러다보면 더욱 더 아내에게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한참 아버지가 필요할 때 같이 있지 못해준 자녀들은 난데없이 아버지가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하고 서먹서먹하다. 갑자기 많은 시간을 같이하다 보니 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 서로 보이게 되면서 오히려 마음을 상하는 수가 많다.

아내 입장에서는 평생 살갑게 굴지 않던 남편이 갑자기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이제 아이들 키워놓고 친구도 만나고,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고 싶은데 갑자기 혹이 달린 꼴이다. 아내도 싫어하고 아이들도 불편해해서 집안에서는 도저히 설 자리가 없는 남편은 이사 가는 날 강아지라도 놓치지 않고 꽉 안고 있어야 버려지지 않고 함께 이사 갈 수 있는 그런 한심한 존재로 전락해버린다. 평생 가족을 위해서 자기 몸과 시간을 다 바쳐 일해 온 남편 입장에서는 속이 터지다 못해 화병이 생길 지경이지만 현실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젖은 낙엽 증후군을 극복하는 지혜와 노하우

이런 젖은 낙엽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평시에 극복 방법을 터득해두어야 한다. 젖은 낙엽 상태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깨우친다면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항상 열려있다.

첫째, 어떻게든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라. 바쁜 사람은 가족과의 시간을 약속 시간으로 일정에 포함시켜서 잡아두어야 한다. 퇴근 후 집에 가는 것이 아무 일도 없는 날이 아니라 가족과의 약속으로 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 약속은 가급적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어기지 않도록 하라. 사업 상 만난 사람, 친구, 동료들은 은퇴하고 늙으면 서로 만나기도 쉽지 않다. 죽을 때까지도 만나야 하는 중요한 사람은 가족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그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 약속을 무시하지 마라.

둘째,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취미나 활동을 만들어라. 평생 다른 방식으로 살면서 대화도 안 해왔다고 하면 수십 년을 함께 살았을지라도 무엇 하나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운동이던 취미든 간에 평시에 아내와 함께 해오던 일이 있다면 퇴직 후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세 번째, 꼭 아내와 함께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할 수 있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많이 기울여라. 자꾸 거치적대지 말고 스스로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만들어 내라.

네 번째, 아내와 가족들에게는 쉴 새 없이 칭찬하라. 어쩌다 보는 아버지에게 지적받고 야단맞는다면 건강하게 살 수 없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어도 『으윽』 소리가 날 정도로 혀를 깨물고 참으라. 내 몸 깊은 곳에서 『사리』가 생기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참아야 한다. 물론 옳은 말도 해야 하고 가르치고 싶은 일이 있지만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친절하게 말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가부장적인 우리나라 남편들에게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지만 이것들이 바로 자신도 행복하게 하고 가족들도 행복하게 만드는 좋은 길이라는 것을 믿으라. 결국 평시에는 같이 지내지 않으려다 나타나면 누구나 힘들어한다. 항상 같이 지내는 것이 식구라는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