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인의 선택, 신병 비관 자살

과거 대법원장을 지낸 이가 얼마 전 신병을 비관, 한강에 투신, 자살했다. 그는 1시간 만에 가까스로 구조됐으나 끝내 심장마비로 숨지고 말았다. 우리 사회 저명인사들의 자살은 이뿐만이 아니다. 2003년 8월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자살 이후 안상영 부산시장,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 박태영 전남지사 등이 그들. 많은 사람들이 동기를 몰라 당혹해 했던 영화배우 이은주 씨의 자살 사건은 지금도 모방 자살을 낳고 있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남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 이들은 도대체 왜 자살이란 모진 방법을 선택했을까.

동반 자살을 부추기는 인터넷

 한 때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이들과 동반 자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경험을 가진 한 여인도 엊그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동반 자살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여대생 세 명이 자살을 기도한 사건도 발생했다. 한 여대생이 '청산가리로 같이 죽을 사람을 찾는다'는 글을 올리면서 시작된 이들의 만남은 결국 두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는 글을 올린 지 불과 5일만의 일. 지금도 인터넷 자살사이트에는 수많은 자살모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꽃뱀 사기가 부른 한 노인의 죽음

 충청도에서 있었던 사건. 몇 달 전 한 노인이 자신의 집 현관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경찰수사 결과 이 노인의 죽음은 '꽃뱀'의 꼬임에 빠진 현실을 견디지 못해 비관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앞서 93세 남편이 치매에 걸린 94세 부인의 목을 조르고 자신도 목을 맨 사건도 있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61세 이상 자살자수가 36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하루 평균 10명이 넘는 노인들이 스스로 세상을 등진 셈이다.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은 지금 자살 중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2002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4위, 증가율로는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10년간 자살 사망자 누계는 7만 명 규모. 지난 2003년도를 기준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연간 자살 사망자 수는 1만 932명에 달한다. 이는 48분마다 1명, 하루에 30명이 자살로 사망하고 있다는 뜻이며, 「대구 지하철 참사」를 1주일에 한 번씩 경험하는 것과 같다.

 자살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암,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당뇨병 다음으로 많은 사망 원인이 됐으며 특히 20~30대 젊은 층에서는 사망원인 1위로 올라섰다. 물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이 보다 훨씬 더 많아서 1분30초마다 1명, 하루에 960명씩 일어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이에 따라 연간 자살 시도자 수도 35만여 명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또, 우리 국민 10명 중 3.5명은 자살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다는 보고도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팀이 전국에 사는 15~69세 사이 1,02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조사 결과다. 직업별로는 무직자, 지역적으로는 대도시 거주자가, 성별로는 남성보다는 여성이, 결혼 상태별로는 이혼하거나 배우자가 사별한 사람들이 생각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나 교육수준에 따른 차이는 없었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자들은 자살의 정신 역동적 유형을 몇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역습적 유기」로서의 자살이다. 예를 들어 실연당한 뒤 자살하는 경우, 상대가 나를 찼으니 이번에는 내가 자살로 역습함으로써 상대를 똑같이 차고 저버리고 싶다는 심정의 발로로 풀이된다.

 둘째는「반전살인」으로서의 자살이다. 영화 「패왕별희」에서 보이는 자살이 여기에 해당된다. 「패왕별희」에는 샬루의 아내인 주샨이 목을 매어 자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문화혁명의 격랑 속에서 군중에 의해 끌려 나온 샬루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동료 경극 배우인 데이가 동성애자라고 폭로한다. 이에 화가 난 데이는 샬루의 아내인 주샨이 창녀였다고 말한다. 그러자 샬루는 아내인 주샨마저 배신하여 「그것은 사실이며 자신은 그녀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소리친다. 이에 주샨은 자살로 대항한다.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어 상대를 평생 죄책감 속에 살도록 가둬버린 것이다.

 셋째는 도피의 수단으로 감행되는 자살이다. 예술에 대한 몰이해와 윤리의 멍에로 숨통을 조이는 사회가 싫어 윤심덕과 김우진이 현해탄에 몸을 던지는 영화 「사의 찬미」가 여기에 해당된다. 「자기 응징」으로서의 자살도 있다. 삶에서 매우 중대한 일을 성취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에 자신을 처벌하는 뜻쯤으로 해석된다.

 아무튼 자살은 애써 뭔가를 감추거나 단순히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혹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해도 결코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최근 우리 사회의 잇단 자살 풍조 확산은 이미 그 자체로 심각하게 다뤄져야 할 범국가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선 무엇보다 생명 존중의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절실하다. 자살은 모방성이 강한 만큼 언론의 흥미위주 보도 관행을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자살 사건을 다루는 검찰 차원에서도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동시에 상담센터를 활성화하는 등 사회적인 지원체계를 마련하는 일도 시급하다. 이와 함께 자살을 미화하고 수법을 알려 주는 등 자살을 방조하는 일부 사이트 등에 대한 철저한 근절 대책이 필요하다.

이기수 / 국민일보 편집국 정책기획부 전문기자(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