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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청소년은 팬터지를 즐겨 읽지만 30여 년 전에 청소년기를 겪었던 내 또래들은 당시 괴테나, 톨스토이 등 대문호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책도 당시 읽었다. 하도 오래 돼 줄거리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베르테르가 권총 자살한 것은 기억에 남는다. 그때는 이 작품 때문에 유럽의 젊은이들이 권총 모방자살을 많이 했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유명 여배우 이은주씨가 지난 2월22일 자살한 사건을 계기로 베르테르란 이름이 다시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필자는 독일의 의료보험제도를 살피기 위해 프랑크푸르트 등을 들렀다가 괴테의 생가와 괴테기념관을 찾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귀국한 날짜가 2월20일이었다. 이틀 뒤 나는 그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3월24일자 신문들은 모방자살의 경향을 뜻하는 「베르테르 효과」가 이은주씨 사건에서도 발견됐다는 소식을 큼지막하게 전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가 올 들어 3월17일까지 2달 여 동안 서울 강남구 등 7개 구에서 발생한 사망사건을 분석한 결과 이은주씨 사건 이후 하루 평균 자살자가 이전 하루평균 자살자보다 2.5배나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씨와 같은 자살 방법을 택한 경우가 과거에는 53%였으나 이씨 사건 이후에는 80%였다고 검찰은 분석했다. 이런 현상이 정말로「베르테르 효과」인지 검찰 분석만으로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따라서 「이은주를 따라서.... 모방자살, 베르테르 효과 급증」이란 단정적인 제목으로 이렇게 보도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으로 이런 분석이 맞은 것이라면「베르테르 효과」가 생긴 것이 누구 때문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당시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고 몇몇 사람만 읽었더라면 모방 자살은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최근 늘어난 20대(이은주씨도 20대였다) 자살 사건이 이은주씨 사건을 모방한「베르테르 효과」라면 여기에는 언론사들이 앞다퉈 대문짝만하게 그리고 줄기차게 이씨의 자살을 확대보도한 데 큰 원인이 있지 않을까.

대중매체, 곧 신문과 방송, 인터넷매체들은 자살보도 때 신중해야

자살은 전염병이 아니면서도 전염병이 될 수 있다. 바로 「베르테르의 효과」때문이다. 그래서 자살예방전문가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대중매체, 곧 신문과 방송, 인터넷매체들은 자살보도 때 매우 신중해야 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 대중매체들은 무분별하게 자살 보도를 해왔다. 사회적 자살을 줄이기 위한 엄격한 보도원칙을 거의 지키지 않았다.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비극적인 투신자살, 안상영 전 부산시장의 옥중 자살,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과 박태영 전남도지사의 한강 투신자살 등 많은 유명인사의 자살 사건 보도에서 언론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자살 방식을 세세하게 묘사한 것은 물론 그들을 동정하거나 때로는 미화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지난해 7월 한국자살예방협회와 한국기자협회, 보건복지부가 선진국들이 시행중인 언론의 자살보도 기준을 만들어 발표한 것은 이런 국내 언론의 무분별한 자살보도를 막아보자는 뜻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발표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한 유명 여배우 자살 사건을 계기로 국내 언론의 자살보도는 옛날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자살 원인을 두고 확인되지 않은 온갖 추측성 기사가 난무했다. 노출연기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등 선정적인 내용도 있었다.

유명인의 자살 사건은 언론으로서 당연히 다룰 수 있는 소재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확대해서 보도하거나 중계방송 하듯이 보도하는 것은 곤란하다. 더더군다나 이를 미화하거나 「하늘 나라에 가서 편히 쉬라」는 등의 현실을 도피하고 사후 세계를 미화하는 듯한 보도는 삼가야 한다. 우리는 유명인의 자살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언론 등 사회가 이에 적절히 대응하면 모방자살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잘고 있다. 이미 여러 사례에서 드러났고 연구된 바 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978년 지하철이 개통된 뒤 80년대 달려오는 지하철에 뛰어드는 것이 가장 대중적인 자살방법으로 떠올랐다. 여기에다 매스미디어가 지하철 자살을 극적이고 충격적인 기사거리로 다루면서 자살 시도 빈도가 급격히 늘어났다. 오스트리아 자살예방협회는 특정 자살 방법에 대한 설명이 자세할수록, 자살 기사가 신문 1면에 실리거나 자살한 사람의 사진을 실을 때 모방자살이 늘어나고 위기 상황을 이겨내고 자살 위기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실을 경우, 자살 외의 대안을 제시할 경우에는 모방 자살이 감소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언론 보도지침을 만들어 언론사에 배포하고 이를 따라 줄 것을 부탁했다. 그 결과 1988년부터 지하철 자살률이 급격히 떨어지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록그룹 <너바나>를 이끌던 커트 코베인이 1994년 권총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해 자살률은 1993년보다 높지 않았고 권총을 사용한 자살률도 증가하지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연구진들은 그의 부인인 코트니 러브가 코베인은 자살 전에 마약문제가 있었음을 밝히는 등 그의 죽음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언론에 피력한 것이 모방자살을 부추기지 않은 것으로 분석했다.

자살을 미화하는 발언이나 보도는 삼가야 한다

우리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 맞서오다 분신 자살한 전태일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미화하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의사를 극단적으로 표시하기 위해 분신이라는 극한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다. 3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자살을 미화하는 발언이나 보도는 삼가야 한다. 생명권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 가치의 인권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자살증가 속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운데 1위이며 20대와 30대의 사망원인 중 자살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 국민 사망원인 가운데 5위가 자살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자살이 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자살을 그때그때 중계방송 하듯이 보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텔레비전에서는 종종 자살한 장소와 자살한 경위를 상세하게 보도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인형이나 물건을 가지고 이를 재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런 보도를 하는 방송사가 있으면 시청자가 거센 항의를 해야 한다. 우리 언론은 못생긴 남자 대학생의 자살은 보도하지 않더라도 여대생, 그것도 미모의 명문 여대생이 자살하면 신문의 한 페이지를 할애한다. 보통 사람들의 보통 자살을 시시콜콜 보도할 필요가 없고 보도해서도 안 된다. 이은주씨 사건을 계기로 자살을 부추기는 언론에서 자살을 예방하는 언론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그 첫걸음은 역시 자살예방전문가가 권고하는 자살보도 기준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안종주 / 국민건강보험공단 기획상임이사, 본지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