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옷, 화장기 없는 어두운 표정,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듯 조용히 걸어오는 그녀. 그녀의 첫인상은 이랬다. 상담을 마친 후 하루이틀 힘겹게 센터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부모의 이혼과 계부의 학대로 자살기도까지

그녀의 자서전 프로그램 시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하나 둘씩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나갔다. 교사인 부모님 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녀는 어머니의 외도로 부모님의 이혼을 경험하고, 초등학교 2학년인 10살때부터 사기전과가 있던 계부인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의 아픔이 시작되었다.

테니스 라켓으로 온 몸이 피투성이 될 만큼 구타를 당했으며, 담뱃재를 억지로 먹게하는 신체적 학대, 어린 나이에 가사생활을 담당해야했던 심리적 고통으로 어린 나이에 자살까지도 생각했다. 아픈 상처를 안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녀. 힘들지만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학업성적도 뛰어나서 선생님들의 칭찬을 도맡았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에 대한 아픔으로 「내 친구들이 나의 가족생활을 알지는 않을까, 나를 비웃고 있을거야」하며 점점 피해망상적인 생각으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자퇴까지 하였다. 이성관계에 있어서도 8년 동안 사귀었던, 결혼을 약속한 남자 친구와의 결별이 계기가 되어 술을 매일 마시게 되었으며 어느 순간 술 없이는 못 사는 상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녀는 딸이 혼자 1.8리터의 소주를 들이키고 방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낀 어머니의 권유로 센터에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던 그녀가 단주 26일째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녀가 직접 쓴 글을 소개한다.

「까리따스와의 인연도 26일째. 날마다 기록갱신을 하고 있다.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것. 오늘도 깨고 내일도 깨고, 계속 깨야지~~

세상은 내게 가혹하리만큼 적대적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떠밀리고 밟히고, 얻어 터지고, 내동댕이쳐져 만신창이가 된 나는 세상에게 똑같이 대해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나 심성이 유약한 나는 수없는 복수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세상에게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한 채로 나 자신을 깎아 내리고, 세상에게서 받은 상처들을 후벼 파고 들쑤시기만 했다. 상처는 고스란히 나의 몫이었다. 이런 억울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잊기 위해 나는 술을 선택했다.

아득하고 몽롱하고 꿈결 혹은 꿈과 현실 사이 어느 지점 같기도 한 취한 상태는 늘 긴장으로 굳어있는 내 사지를 서서히 풀어주고, 한여름 무더위에도 얼음장인 내 손과 발을 데워주고, 복잡했던 머리 속 실타래도 어느 순간 깨끗이 지워지면서 스르르 잠에 빠질 수 있었다. 그렇게 그 상태로 의식없이 죽었으면 여한이 없었다. 그러나 내 목숨은 예상 외로 길었고, 술은 차츰 나를 지배했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내 영혼을 야금야금 축내고 있었다. 내가 술에 종속되었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작년 겨울 신랑과 간 병원에서 간경화 판정을 받았고 단 한 방울의 술도 독이라는 의사의 말에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담담했다. 보름여의 알코올 병동생활을 마치고 곧바로 술을 마셨고 굶주려 있던 탓인지 평소보다 과하게 마셨다. 다음날 잠에서 깨니 뒤통수가 찢어져 베개에 피가 흥건했고, 온 몸은 긁히고 멍투성이인데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머릿 속이 온통 하얘졌다.

단주 26일 째인 지금도 전화로 만나는 지인들은 술 끊었다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억울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그렇게 살아왔으니. 하지만 내 스스로에게 당당하기에 기분 나쁠 것도 없다. 오늘도 나는 맑은 정신으로 잠에서 깨어 소주가 아닌 냉수를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오늘도 술을 마시지 않으리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를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단주를 결심한 그녀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들려왔다. 아이가 뱃 속에 있다며 임신소식을 알렸다. 모두들 기뻐했으며,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부터 그녀는 화장도 하고 색깔있는 옷을 입는 등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무단한 노력을 하였다. 센터의 까페모임인 늘아사모(늘 아름다운 세상을 사랑하는 모임)에 예쁜 딸의 모습과 농촌에서 자신이 가꾸고 있는 채소, 과일들의 사진을 올려 놓았다. 일명 까리따스 베이비인 뱃 속의 그 아이는 어느덧 생후 6개월이 지나 첫돌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녀의 단주일 또한 500여 일이 지나가고 있다.

멀리서나마 그녀의 글을 읽고 있지만 그녀가 승리했으며 알코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모습을 나는 지금 보고 있다. 그녀의 기록갱신은 하루하루 이어지고 있다.

김선희 | 서울까리따스알코올상담센터 정신보건사회복지사